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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정선(鄭敾, 1676-1759)은 한국 회화사에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화가입니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으로 알려진 그는 조선의 실제 자연 경관을 그린 진경산수화의 창시자로서 한국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생애와 배경
정선은 1676년(숙종 2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원래 전라남도 광산(현 광주광역시)과 나주 지방에서 세거하던 사대부 집안이었으나, 고조부 때 경기도 광주로 옮기고, 이후 서울 서쪽으로 이주해 살았습니다. 정선은 2남 1녀 중 맏아들로, 아버지는 시익(時翊), 어머니는 밀양 박씨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정선은 매일같이 그림을 그렸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여가로 그림을 그리는 양반 화가(문인화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향력 있는 이웃들의 추천으로 도화서(조선 왕조의 그림 기관)에서 일할 수 있었고, 후원자와 의뢰인을 위한 산수화를 제작했습니다.
20세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고, 이후 현감(縣監)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하양(1721-1726), 청하(약 1733년), 양천(1740-1745) 등의 지역 현감으로 봉직했습니다. 말년에는 영조 임금으로부터 1754년에 4품 관직을, 1756년에는 2품 관직을 하사받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예술적 발전과 진경산수화의 창시
정선의 예술적 여정은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했으나, 30세를 전후하여 한국 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린 산수사생(山水寫生)의 진경(眞景)으로 전환하여 동방 진경산수화의 종화(宗畵)가 되었습니다.
1711년(36세), 그는 지방 관리 박태유(1648-1746)와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며 '풍악산 신묘년(風岳山 辛卯年)' 13점 화첩을 제작했습니다. 이듬해에는 금강산을 다시 방문하여 '해악실경첩(海嶽實景帖)' 30점 화첩을 완성했습니다. 두 화첩 모두 정선의 후원자들이 쓴 다양한 시로 보완되었습니다.
정선은 여행을 즐겨 금강산을 비롯한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과 함께 '삼재(三齋)'라고 불렸습니다. 특히 금강산과 영남 지방, 서울 근교 일대를 다니면서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을 토대로 표현하여 새로운 화격을 이룩함으로써 전통 실경 산수화의 면모를 일신하고, 진경 산수화풍의 정형을 수립했습니다.
진경산수화의 특징과 의의
진경산수화는 '진짜 경치'를 사생하여 '참된 경지'로 승화시킨 그림입니다. 진경은 경치의 본질을 포함한 더 넓은 개념으로, 작가가 경치를 보고 느낀 감동과 환희까지 그림 속에 솔직하게 표현된 그림을 말합니다. 실재하는 경치를 보고 그린 것만으로 무조건 진경산수화라고 볼 수는 없지만, 실경을 사생하는 것은 진경산수화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정선의 진경 화풍은 기존 화법과 남종화법을 우리 산천의 형상에 어울리는 필법으로 소화하여 낸 것입니다. 실경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하여 경관에서 받은 감흥과 정취를 감동적으로 구현했다는 데 그 특색이 있습니다.
양식적으로는 동적인 대각선이나 사선을 활용한 화면 구성법을 비롯하여 습윤한 필치와 듬성한 태점(苔點), 괴량감 넘치는 짙은 적묵(積墨)의 바위와 능란한 편필직필(偏筆直筆)의 스케치풍 소나무 묘사법 등을 특징으로 구사했습니다.
특히 금강산 화법에서는 예각적인 암봉(巖峰)들을 날카로운 필선으로 요약하여 굳세고 빼어난 골기(骨氣)를 나타냈습니다. 그 다음 이를 토산(土山)의 부드러운 필치와 대조시켜 만물을 생성 화육시키는 원동력인 음양의 조화처럼 보이도록 했습니다.
정선은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主調)로 하여 암벽(岩壁)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당대에 그쳤다는 평가도 있지만, 실제로는 많은 후배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표 작품
정선의 대표작으로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금강전도(金剛全圖)', '통천문암도(通川門巖圖)' 등이 있습니다. 특히 '인왕제색도'는 우리 산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거친 붓질 표현이 특징입니다. 이로 인해 그림 속 화강암은 묵직하고 단단한 느낌을 풍깁니다.
'금강전도'는 금강산의 실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한국적 정서를 담아냈습니다. 또한 '만폭동도'의 풍경은 정선이 직접 본 모습을 작품화한 것으로, 사실감이 두드러집니다. 이는 화폭을 가득 채우는 기법과 섬세한 붓질로 더 부각됩니다. 또한 당시 조선의 평민 남성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작품이 더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정선의 그림에는 다채로운 숨은 그림들이 아주 많았으며, 문재(文才)가 없었던 탓으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落款)만이 화폭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정선파의 형성과 영향
정선의 화풍은 강희언(姜熙彦), 김윤겸(金允謙), 정황(鄭榥), 김유성(金有聲), 최북(崔北), 정충엽(鄭忠燁), 장시흥(張始興), 김응환(金應煥), 김석신(金碩臣), 김득신(金得臣), 거연당(居然堂), 신학권(申學權) 등 주로 중인층 문인 화가들과 화원들에게 파급되어 정선파(鄭敾派)라는 유파를 형성하면서 조선 후기 진경 산수화풍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정선파로 분류되는 화가들은 우선 정선에게 직접 배웠다고 하는 심사정, 김희성(金喜誠), 마성린(馬聖麟) 등과 손자 정황, 화원 장시흥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섭(權燮)이나 박사해(朴師海), 이방운(李昉運), 신학권 같은 문인화가도 진경산수를 그릴 때에는 정선화풍을 수용했습니다.
특히 진경산수화를 그릴 때에 많은 화가들이 빽빽한 구성, 굳센 필력, 빠른 속필(速筆), 풍부한 먹의 사용, T자형 소나무 묘법 등 정선식의 화풍을 즐겨 구사했습니다. 이는 정선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평가
정선은 조선 후기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 화풍의 틀을 깨고 조선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노력했으며, 그만의 특유한 기법으로 한국 미술사가 독창성을 갖출 수 있게 했습니다.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 성행한 조선 성리학과 실학의 영향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당시에는 민족적 자긍심을 중요시하고, 실재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분위기가 유행했습니다. 정선은 이를 자신의 미술 영역에 끌어와 한국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단순히 미적 가치를 넘어 조선 후기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중요한 문화적 산물입니다. 그의 작품은 조선의 자연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담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한국인의 정체성과 미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정선의 예술세계는 동시대인들과 후대 세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결과적으로 그 시대의 스타일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오늘날에도 크게 감상되고 있으며, 한국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009년에는 정선 사망 2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정선의 삶과 그림'이라는 특별전이 개최되었으며, 독일에서 돌아온 21점의 작품을 포함한 총 142점의 그림이 전시되어 그의 다양한 예술적 업적을 조명했습니다.
정선이 개척한 진경산수화는 한국 미술사에서 중국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한 첫 번째 사례로서, 그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의 예술은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오늘날까지도 한국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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